1982년 어느날, 머나먼 외계에서 거대 우주선이 날아왔습니다. 아... 이런, 흔하디 흔한 SF의 도입부로군요. 뉴욕이 아니라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대의 도시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나타났다는 것만 빼면 그대로 [인디펜던스 데이] 도입부라고 해도 믿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우주선이 두 달 가까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떠 있습니다. 지구인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도 아니고, 침략전쟁을 걸어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일도 없으니 일상으로 돌아가면 되겠구나 하고 신경 끄기엔 인간은 너무나 호기심이 많은 생물이죠. 처음에는 긴장하여 상황을 지켜보던 남아공 정부는 결국 대형 토치로 -_- 우주선에 구멍을 뚫고 내부에 진입합니다. 내부에 진입한 남아공 군대가 발견한 것은, 식량 부족으로 기아 상태에 허덕이고 있는 우주 난민이었습니다.
지도부가 전염병으로 멸망하여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잃어버린 외계인들은 지구인들과 친교를 맺는다거나, 지구를 정복한다거나 등의 계획 따위는 없어 보입니다. 이들 각자의 힘은 사람을 휙 집어던질 수 있을 정도로 세지만, 고유의 언어를 갖고 있다는 것 외에 딱히 대단한 지능을 가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저 각자 돌아다니며 쓰레기를 뒤져 고무 타이어, 고양이 사료 (이들은 고양이 사료를 미친듯이 좋아합니다. 무슨 마약을 찾는 것 같아요.) 등의 먹을것을 찾아다니고, 사람들을 폭행하는 등의 소동을 일으킬 뿐입니다.
덕분에 외계인들은 요만큼도 신비스럽다거나,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거나 하지 않고 그냥 혐오스러운 홈리스 집단으로 묘사됩니다. 생긴것도 무슨 촉수 달린 거대 메뚜기마냥 끔찍스럽게 생겼죠. 결국 요하네스버그 시민들은 이들을 프론(새우를 가리키는 영어인데, 남아공에서는 이렇게 생긴 벌레를 프론이라고 하기도 한다는군요.)이라고 부르며 추방 운동을 벌이기에 이릅니다. 이들이 격리수용된 장소의 이름이 제 9 구역, 즉 district 9 입니다.
27년이 흐르고, 요하네스버그 시내 한가운데의 district 9은 치안능력을 상실하고 슬럼화된 상태입니다. 시민들의 불만의여론이 높아지자 남아공 정부는 이들을 새로운 수용 구역인 district 10으로 옮기려 하는데, 여기에 남아공 정부의 대리자격으로 MNU라는 다국적 군수기업이 투입됩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비커스 판 데 메르버라는 이름의 좀 어리버리해 보이는 MNU 직원으로, 어영부영하다가 이 계획의 책임자 자리에 앉게 됩니다. MNU의 높은 자리에 비커스의 장인이 앉아 있는 것도 아마 한 몫 했겠지요. 이제 비커스는 MNU의 군사력을 등에 업고 주민들의 이주 동의서에 "서명"을 받기 위해 치안부재상태가 된 디스트릭트 9에 진입했다가, 의문의 사고를 당합니다.
영화의 도입부는 이 과정을 인터뷰와 뉴스 영상을 편집한 가짜 사회고발 다큐멘터리 스타일로 짧게 압축하여 보여줍니다. 근래 본SF영화 가운데 제일 신선한 도입부가 아니었나 싶네요. 사실 항성간 항해가 가능할 정도의 기술력을 가진 외계 우주선의 수뇌부가 고작 전염병으로 전멸해도 되는건가? 하고 묻고 싶기도 하지만, 설정은 어디까지나 설정이니까요.
이 영화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다고 해요. 남아공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국내 사회문제를 풍자하는 SF 영화라는 점에서 봉준호 감독의 괴물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괴물]을 보는 우리의 시각과 외국 관객들의 시각이 다른 것처럼, 우리도 결고 남아공 관객들이 보는 것처럼 이 영화를 바라볼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남아공의 정치상황에 대해 거의 모르고 관람해도 충분히 재미있는 영화였습니다.
관객이 처음 접하게 되는 우리의 주인공 비커스는 맡은 일을 귀찮아하고 민원인(?)들에게 불친절한, 참으로 평범한 공무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사람이 외계인들을 대등한 인간적 존재로 대하지 않고 좀 지능이 떨어지는 바보로 대하는 것이 눈에 보여요. 그리고 관객들도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아무튼 생긴 것도 혐오스럽고, 하는 짓도 혐오스럽고, 그렇다고 대단한 기술이나 지능을 보여줘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아니니까요.
한편, MNU라는 기업이 지휘하는 이 계획의 이면에는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비커스는 외계인들에게 형식적인 서명을 받는 것보다는 이들이 우주선에 함께 싣고 온 외계 무기와 기술에 더 많은 관심을 보입니다. 이 외계인 무기들은 인간의 무기보다 압도적인 성능이나 상상할 수 없는 기술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인간의 기술로 만들 수 있는 무기보다는 성능이 나아 보입니다. 다만, 이 무기들은 인간이 조작할 수 없는 것으로, 외계인의 DNA에만 반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MNU는 이 무기들을 압수하여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 비커스는 외계인 중 한 명인 크리스토퍼 존슨(이 이름은 수용 당시에 편의상 붙여준 영어식 이름인 걸로 보입니다.)과 만나게 됩니다. 이 외계인은 다른 외계인들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비교적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남아공의 법률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으며, 집 안에 쳐들어가 보니 인간에게서 기계장비와 다량의 컴퓨터들을 훔쳐다가 어떤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이 집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만져보던 비커스는 어떤 액체를 실수로 자기 얼굴에 뿌리게 됩니다.
비커스가 실수로 얼굴에 뿌린 이 액체는 알고보니 인간의 몸을 외계인의 몸으로 바꿔놓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오른팔부터 시작해서 점점 온몸으로 퍼져 나가면서, 비커스의 몸은 징그러운 외계인의 모습으로 변하게 돼요. 벌레와 닮은 외계인으로 변신하는 대목에서 카프카가 생각나더군요. 영화는 카프카의 [변신]과 동일한 충격적인 방식으로 주인공을 인간의 세계로부터 격리시킵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짐작이 가시죠? MNU는 이 사람이 외계인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서 이 사람을 병원에서 긴급 납치하고,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는 각종 인체실험을 행합니다. 비커스는 산채로 해부될 뻔한 위기에서 놀라운 힘으로 연구원들을 뿌리친 후 (외계인 DNA로 부터 얻은 힘인 것 같아요) 차를 훔쳐서 탈출하는데 성공하지만, 언론에는 이미 그가 외계인을 상대로 성을 매매해서 이런 병에 걸린 것처럼 보도가 되고, 무엇보다 최악인 것은 그가 너무나 사랑하는 그의 아내가 그 거짓 보도를 거의 믿고 있다는 점입니다. 결국 도망칠 곳이 없어진 비커스는 그를 의심할 사람이 없는 유일한 장소인 디스트릭트 9으로 도망칩니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은근슬쩍 가짜 다큐멘터리 스타일을 버리고 우리의 주인공 비커스에게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이 과정은 관객의 시각 또한 함께 인간의 세계로부터 분리시켜 비커스의 시각을 따라가게 하는 효과가 있어요. 다른 분들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 사실을 영화가 한참 진행되고 나서 깨달았을 정도로 이 과정은 효과적입니다.
디스트릭트 9은 고철 쓰레기장위에 세워진 판자촌처럼 생겼습니다. 이 와중에 비어 있는 판자집에서 절망적인 하루밤을 넘긴 비커스는 다음날 크리스토퍼 존슨을 만나게 됩니다. 크리스토퍼 존슨은 비커스가 실수로 얼굴에 뿌린 그 액체를 어쨌느냐고 묻죠. 그렇지만 그 액체는 이미 MNU가 가져가서 연구실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알고보니 크리스토퍼 존슨은 망가져서 요하네스버그 상공에서 좌초중인 우주선을 고칠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크리스토퍼 존슨의 집 지하실은 사실 우주선에서 떨어져나와 그동안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우주선의 사령선이고, 그 우주선을 고칠 유일한 방법은 이제는 MNU가 보관하고 있는 그 액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주선을 고칠 수 있다면 비커스 또한 인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하는군요.
이제 비커스에겐 방법이 없군요. 내 몸이 외계인으로 변해 버리는 공포스러운 상황에서 탈출해서 사랑하는 아내에게 돌아가기 위해, 비커스는 크리스토퍼 존슨과 협력해 MNU의 연구실에 다시 침입하려고 합니다. 상황은 절망적이지만 다행히 비커스와 크리스토퍼 존슨에게는 외계인 무기를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죠. 두 사람...이 아니고 한 인간과 한 외계인은, 외계인 무기에 집착을 보이는 또다른 집단인 나이지리아 갱단에게서 외계인 무기를 강탈해 MNU로 향합니다.
이제부터 벌어지는 것은 헐리우드식 액션 활극이죠. 다만 외계인과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인간과 한 명의 외계인이 다른 모든 인간들의 폭력에 맞서 싸우게 됩니다. 이 부분은 제작자 피터 잭슨의 취향을 반영해 꽤나 잔인하지만, 너무 무겁지만은 않은 적당한 수준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마지막까지 너무나 비커스가 "인간"적이라는 점이겠죠. "비인간적인" 인간들과 함께 맞서 싸우며 크리스토퍼 존슨과 동지애를 느낄 법도 하지만, 비커스의 제 1 동기는 어디까지나 외계인으로 변신하는 것을 막고, 그의 사랑하는 부인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외계인 생체실험에 대한 분노, 너무나 비인간적인 인류에 대한 혐오 같은 거창한 개념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은 여전히 인간의 마음의 바닥을 이루는 탐욕과 포악성을 엿보고, 같이 분노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백미는, 외계인의 파워수트 같은 로봇에 탑승하게 된 비커스가 크리스토퍼 존슨을 버리고 도망치려다가, 마지막 순간에 발길을 돌려 그를 보호하며 같이 도망치게 되는 장면입니다. 비커스는 여전히 치졸하고 이기적인 인간이지만, 외계인의 한명이 된 것도 아니고 그 가운데 한 명이 되고 싶어하는 것도 아니지만, 여전히 외계인에게 손 내밀고 도와줄 수 있게 된 것이죠. 그가 더 위대한 인간이 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외계인을 이해하고 손 내밀 수 있게 된 점이, 이 영화가 정말로 하고 싶은 얘기일 겁니다. (물론 크리스토퍼 존슨이 다른 외계인과는 달리 인간적인 감성과 지성을 내보일 수 있는 유일한 외계인이라는 점, 게다가 그의 아들까지 등장해서, 종을 불문하고 어린 새끼에게는 무조건적인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인간의 감정을 이용한다는 점 같은 반칙들은 넘어가 줍시다.)
이후 비커스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아주 잠깐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비커스는 이제 완전히 외계인의 모습이 되어 버렸지만, 이제 관객들에게 더 이상 그 모습은 징그럽고 멀리하고픈 모습이 아닙니다. 쓰레기더미 속에서 아내에게 줄 꽃을 만들고 있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인간적이었습니다.
ps. 주인공 역을 맡은 남아공 배우 Sharlto Copley가 상당히 마음에 들더군요. 대단히 어려운 연기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리버리하고 소심하고 이기적인 비커스의 마음의 변화를 그럴싸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원래는 배우가 아니라 영화제작자 겸 감독이었다고 해요. 장편영화에서 연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