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이야기 #2

from 글질 2005/06/25 13:37
남자는 옛날 무성 영화의 세트 같은, 혹은 무성 영화의 한 장면을 컬러로 바꿔 놓은 듯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벽돌색 건물들은 xx 지물포, xx 전당포 같은 간판들을 달고 있었다. 남자는 묘하게 익숙한 광경이라고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막 그녀와 통화하고 나온 참이었다. 혹은, 그녀일지도 모를 무엇과 통화하고 나온 참이었다. 그것은 분명 그녀의 목소리였지만, 꿈처럼 달콤하고, 꿈처럼 공허한 목소리였다. 남자는 수화기에 대고 '너는 가짜'라고 퍼부어주고 싶은 것을 몇번이나 꾹꾹 참으며 끝까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다음 집을 나왔다. 아무래도 직접 그녀를 만나서, 내 눈으로 확인해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그녀의 집까지 가려면 전차를 타고 지하철역으로 가야 했다. 무성 영화의 거리에는 그 거리에 걸맞는 동그스름한 모양의 전차가 오가고 있었다. 남자는 좁디좁은 전차에 올라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밖으로 지나는 풍경은 세트에 그려진 그림처럼, 툭 치면 쓰러질 듯 얇아 보였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계단에는 이상한 액체가 호스를 통해 뿌려지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짙은 휘발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계단 이곳저곳에 휘발유가 뿌려지고 있었다. 조심하지 않으면 미끄러질 거야. 남자는 휘발유가 흥건한 곳을 피해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역사로 향하는 통로에는 계단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많은 수천 개의 호스가 일제히 빗물처럼 휘발유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남자는 발밑을 찰랑거리는 휘발유에 신발을 적시며 플랫폼으로 향했다. 마치 재난 현장에 제발로 들어서는 기분이었다. 남자는 역사 한가운데서 아는 얼굴들을 만났다. 그 음울한 곳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거꾸로 플랫폼으로 향하는 남자를 의아하게 여기는 얼굴로, 그들은 남자와 안부를 나누었다.

플랫폼에 들어서자 그곳에선 더이상 기름의 비는 내리지 않았다. 긴 계단을 내려온 기억을 배반하듯, 그곳은 지상에 건설된 플랫폼이었다. 그곳은 지하철 역이었지만, 지하철 하나가 드나들 철길과 그에 꼭 맞는 모양의 플랫폼으로 이루어진, 정확히 재단된 모양의 일반적인 플랫폼과는 거리가 멀었다. 제멋대로 건설된 선착장처럼 플랫폼은 이곳저곳에 튀어나와 있었고, 양쪽 플랫폼 사이에는 상하행 두개 선이 아닌 십수개의 레일이 이쪽저쪽으로 엉킨 채 놓여 있었다. 불안정하고, 거대하고, 오래된 그 모습이 마치 거대한 공룡의 뼈대 같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언젠가 꿈에서 한번 보았던, 익숙한 풍경이었다.

선착장들 가운데 하나에 서서 차를 기다렸다. 지하철 2호선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오가는 차들은 어쩐지 조그만 전차 몇 대를 이어 놓은 것 같은 경전철 같은 인상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좀처럼 역에 정차하지도 않고 휙휙 지나가고 있었다. 어쩌다 한두대가 역에 서서 사람들을 내려놓으면 남자는 혹시 그 사람들 가운데 그녀의 얼굴이 없는지 기웃거렸다. 황망한 얼굴로 지나는 사람들 가운데 그녀는 없었다. 지하철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문득, 옆에 누군가 같이 서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얀 얼굴, 날카롭고 섬세한 인상, 묘하게 친근한 미소를 가진 남자였다. 그는 자신을 흡혈귀라고 소개했다. 남자는 놀라지 않았다. 처음 볼 때부터 아마 그렇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기 때문에. 남자는 그를 바라보며 내내 아는 얼굴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친구 P의 얼굴인지 아니면 J의 얼굴인지 남자는 끝내 알 수 없었다.

흡혈귀는 미소를 띤 채 끊임없이 남자를 설득했다. 설득의 내용은 여러가지였지만, 그 목적은 남자의 목덜미를 물고 피를 빠는 데 있었다. 그렇게 눈을 목덜미에서 떼지 못하고 이빨을 드러낸 채로 누군가를 설득하려 들다니. 메피스토펠레스라면 굉장히 어설픈 메피스토펠레스라고 생각하며 남자는 피식 웃었다.

그 순간 흡혈귀가 본격적으로 이빨을 드러내며 남자를 덮쳤다. 남자는 간신히 피했지만 그와 동시에 발을 헛디뎌 흡혈귀와 함께 선로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같은 순간 지하철이 선로에 멈춰 서 일단의 사람들을 내려놓았다. 선로 아래의 작은 공간에서 지하철로부터 몸을 피한 남자는 다시 플랫폼 위로 올라갈 방법을 찾아 헤맸다. 그녀가 내렸을지도 몰라. 이런 곳에서 엇갈리고 싶지 않아. 플랫폼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발견한 남자는 황급히 뛰어올라가 플랫폼으로 향했다.

플랫폼의 반대편은 언제부터인지 휘발유의 비로 가득 찬 작은 강이 흐르고 있었고, 그 위에 뜬 작은 보트 한 척에는 방금 지하철에서 내린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남자는 보트가 떠나기 전에 그녀를 찾아야 했다. 저 사람인가? 저 사람인가? 남자가 그녀의 얼굴을 찾아 헤매고 있는 사이 귓가에서 흡혈귀가 속삭였다.

그녀의 이름은 뭐지?

남자는 당황했다. 그녀의 이름이 뭐더라? 나는 누구를 찾고 있었지? 누구와 통화했지? 누구를 만나러 달려나왔지?

그녀의 이름이 기억날 리가 없었다. 남자는 기억의 심연 속을 헤매고 있었고, 그녀의 기억은 그렇게 깊은 곳에는 없었다. 나의 기억이 빠르게 과거로부터 현재로 거슬러올라왔다. 알고 지내던 여자들의 이름이 스쳐지나갔다. 어느 하나도 당신의 이름은 아니었다. 당신의 이름은...

그리고, 벼락 같은 인식.

나는 당신의 이름이 기억남과 동시에 소스라치며 꿈에서 깨어났다.

당신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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