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부 대학원을 다니고 있습니다.
저희 학교만 아니라 한국의 내로라 하는 대학교의 공과대학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유학생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저희 과에도 제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만 서너명은 되는 것 같군요. 개중에는 한국사람이랑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훌륭한 우리말을 구사하는 친구도 있지만, (학부 시절 동기인데 몇년만에 실력이 무서운 속도로 늘더군요) 우리말로는 인사 정도밖에 못하고 주로 영어로 더듬더듬 대화해야 했던 클래스메이트도 있습니다.
몇해 전에는 호주에서 외국인 교수님도 한분 모셔왔지요. 이분이 진행하시는 수업에 들어가보면 시작할때 정중히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한 다음 100% 영어로 진행하십니다.
그래서인지 몇년 전부터 학교측에서는 한국어 구사가 익숙하지 않은 학생이 한 명이라도 있는 강의는 영어로 진행하도록 교수님들에게 적극 권장하고 있습니다. 유학생들에게 차별 없는 강의를 진행하고 학생들의 영어실력도 향상시키기 위해서라나요. 물론 옆 연구실의 모 교수님처럼 "유학생이 들어와도 내 강의는 우리말로 진행됩니다"라고 하시는 훌륭한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교수님들이란 대개 해외에서 열리는 학회에서 영어로 발표하고, 질문 받고, 참가자들과 토론하고 하는데 거의 문제가 없으신 분들이기 때문에, 유학생이 들어오면 그냥 그 학기는 영어로 강의를 진행해버리는 교수님도 계십니다. 요즘 2MB가 설레발치는 영어 몰입교육™을 몸으로 체험해보고 있는 셈이죠.
슬픈 일이지만, 컴퓨터과학을 하는 입장에서 영어를 공부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는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학교 6년 다니는 동안 우리말로 된 전공 교과서는 딱 두권 만져봤을 정도니까요. 최신기술은 전부 영어 논문으로 발표되는데, 많지도 않은 전문 번역자들이 이걸 번역해주지도 않을 뿐더러, 번역해준다고 해도 그거 기다리다간 매년 한번씩 강산이 반쯤 바뀌는 이 업계에서는 즉시 구닥다리 논문이 돼 버립니다. 덕분에 저희 과 학생들의 영어실력 평균은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경험해본 영어 몰입교육™은 상당한 삽질이었습니다. 제가 들었던 영어 강의는 두 개였는데, 하나는 인공지능의 하위분야 중 하나인 Knowledge Base System(이런 이름에도 적당한 번역어를 찾기 힘든 것이 공학교육의 현실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군요. "지식기반"이라고 직역해 버리고 싶지만 "지식기반사회" 같은 용어와 혼동을 일으킬 것 같습니다.)에 대한 강의였고, 하나는 저의 전공분야인 컴퓨터 애니메이션에 대한 강의였습니다. Knowledge Base System은 위에서도 얘기한 호주 출신 교수님이 강의하셨고, 컴퓨터 애니메이션은 중국 유학생이 수업에 들어왔기 때문에 저의 지도교수님(한국인이십니다)이 영어로 강의하셨습니다. 학부때는 영어로 수업하는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양쪽 다 대학원에 와서 들었군요.
저의 영어실력에 대해서도 언급해야겠군요. 저는 영어를 국내에서만 배웠습니다. 영어권 국가에 나가본 경험은 여행을 딱 세번 가본 것이 다입니다. 영어로 된 영화를 자막 없이 볼 실력은 못되고, 영문 자막을 켜놓으면 훔쳐보면서 대화를 이해할 수 있는 정도는 됩니다.
Knowledge Base System을 강의하신 호주 출신 M 모 교수님은, 학생들이 전부 한국인이라는 것을 감안해 매우 천천히 수업을 진행하셨습니다. 호주 사람 특유의 영국식 억양이라 좀 어색하긴 했지만, 발음을 천천히 또박또박 하셨기 때문에 익숙해지고 나면 억양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수업 초반에 course introduction을 진행할때는, 배경지식을 대부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용파악이 아주 잘 되더군요. 아는 내용을 영어로 다시 듣는 거니까요. 문제는, 저같이 한국에서만 영어를 배워 외국인과 대화해본 경험이 많지않은 사람에게는, 새로운 내용이 나올때는 "대충 이런 내용인 것 같은데 내가 들은 게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우리말로 수업할때는 확신이 가지 않는 내용이 나오면 질문을 하면 되는데, 이건 뭐 거의 모든 문장이 "대충 알것도 같지만 완전히 이해가 되지는 않는" 내용이니 질문을 하기도 어렵습니다.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때도 사전을 찾아볼 시간이 없으니 일일이 물어보거나, 어딘가에 써놓고 나중에 사전을 찾아봐야 합니다. 물론 친절한 교수님께서는 학생들이 모를 것 같은 단어 몇개는 설명해주면서 진행하시기도 했고, 강의 후반의 상당부분을 질문시간에 할애하시기도 했습니다만, (덕분에 강의 진행은 정말 느렸습니다.) 질문에 대해 돌아오는 답변도 영어다보니 나름의 애로사항이 꽃피더군요.
이런 식으로 강의를 진행하면 정말 영어공부는 확실히 됩니다. 강의 자체가 영어공부가 되는 게 아니라, 강의를 따라가기 위해, 그리고 나중에 어쩔 수 없이 복습을 하면서, 따로 영어를 공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정작 중요한 강의내용은 핵심은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지만 군데군데 구멍이 숭숭 뚫린 상태입니다. 저는 강의를 들은 뒤로 Knowledge Base가 대충 뭐하는 시스템인지는 알지만, 지금까지도 그때 배웠던 Baysian Network니 Expert System이니 하는 것들이 구체적으로 Knowledge Base와 어떻게 연결되어 어떻게 구현되는지는 잘 모릅니다. 써먹을 수 없는 지식이 된 거죠.
반면에, 연구실의 전공분야이기 때문에 배경지식도 대충 알고 있고 이론도 어느정도 알고 있었던 컴퓨터 애니메이션은 영어를 알아듣기가 참 수월했습니다. 교수님이 한국인이라 한국사람들이 알아듣기 쉬운 영어 발음을 하시는 것도 있었고, 강의는 영어로 했지만 질문/답변은 한국어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간단했던 것도 있었지요. 이 과목은 학점도 비교적 잘 나왔습니다만, 그 학기엔 강의목적의 하나였던 "영어실력의 향상"은 정작 별로 없었습니다. 잘 못 알아들어도 어차피 대충 아는 내용은 다시 확인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강의가 끝나고 노트를 다시 훑어보며 모르는 단어를 확인한다거나 문장을 다시 해석해본다거나 할 일도 없었지요.
저의 경험을 바탕으로, 고등학교에서 영어 몰입교육™의 정식버전이 등장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저는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사교육 시장이 엄청나게 활성화되는 거죠. 학생들이 수업을 들으려면 일단 영어학원에 다녀야 합니다. 고등학교에서부터 영어 몰입교육™을 시행하려면, 학생들이 중학교 수준의 영어실력으로 수업내용을 다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가정이 필요한데, 당연하게도 한국의 중학교에서 가르치는 영어 어휘는 미국의 초등영어 수준, 또는 그 이하입니다. 그 정도의 어휘력으로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수학이나 문학 등의 내용을 다 설명하는 건 어떤 선생님이 와도 불가능합니다. 학생들이 수업내용을 이해하려면 미국 중학생 수준의 어휘력과 그에 준하는 듣기 실력을 가져야 할 거고, 그 정도 실력을 갖추기 위해 수많은 학생들이 영어학원으로 몰려들겠지요.
게다가 그 뿐만이 아닙니다. 한국어로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영어로 듣는 것이 훨씬 쉽고 스트레스도 적습니다. 그걸 깨달은 학생들은 이제 모든 과목을 학원에서 미리 배워올 겁니다. 안그러면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으니까요.
지금까지의 공교육의 문제가 "학원에서 미리 다 들어놔서 학교수업은 별로 따라갈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학교수업을 따라가려면 사교육을 받아야 하는" 더욱 거대한 시장이 열립니다. 학원장들은 솔직히 신났을 겁니다.
여기에 교사들의 영어실력 문제는 언급하지도 않았군요.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이야 요즘에는 다들 영어 열풍이니 널리고 널렸죠. 그렇지만 "중학생 수준의 어휘에 맞춰 쉬운 영어로" 영어가 아닌 과목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가 과연 한국에 몇 명이나 될까요? 영어교사가 아닌 다음에야 중학영어에서 가르치는 어휘수준과 듣기수준을 정확히 짐작할 수 있는 교사가 누구겠습니까. 영어교사가 수학 과학 국어 사회를 다 가르칠 수 없는 바에야, 모든 교사들이 영어교육학을 부전공으로 택해야 임용고시에 합격할 수 있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군요.
내일은 2MB가 또 무슨 정책을 들고나와 영어 몰입교육™ 떡밥을 묻어버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지금 제일 걱정되는 건 이거네요. 덕분에 한반도 대운하 어쩌구는 이미 저멀리로... 그래 운하 파도 좋으니 영어 몰입교육 그딴것만은 하지 말자 이런 기분이랄까요 oTL 아니 그치만 운하는 또 운하대로 심각한데 oTL
보충 : 인수위 '몰입교육' 논란속 후퇴
입에 거품물고 열심히 떠든사람을 또한번 무안하게 만들어 주시는 그분. 당선되자마자 특검 안받겠다고 말바꿀때부터 알아봤지만 정말 취임도 하기 전부터 대단한 정권이십니다.
'글질 > 정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투표하고 왔습니다. (0) | 2008/07/31 |
|---|---|
| 나는 이명박을 찍지 않았다 (4) | 2008/03/13 |
| 영어 몰입교육™ 베타테스트 리뷰 (9) | 2008/01/2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