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 젤라즈니 중단편집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를 아홉번째 완독하고 각 단편에 대해 남겨보는 감상입니다. 이 책이 뭐가 그렇게 좋아서 읽어대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12월의 열쇠
고독한 인간이 어떻게 고독한 신이 되는가에 관한 이야기. 젤라즈니에게 SF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고, 그가 천착하는 주제는 언제나 생명, 신성, 시간, 신화와 같은 기술과는 거리가 먼 주제들이죠. 주인공 쟈리 다크는 거의 전형성이 느껴질만큼 젤라즈니 주인공들의 요소들을 하나하나 모아둔 인물입니다. 밀레니엄 단위의 시간을 휙휙 건너뛰는 건 SF의 기본 소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간격 사이에 행성에서 일어난 변화를 강렬한 이미지로 그려내는 재주는 역시 젤라즈니가 아니면 보기 힘든 재주입니다.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
굉장히 호의적인 평에 비하면 약간 실망스러운 단편. 그래도 하드보일드한 문체 가운데 유독 팔팔하게 살아있는 문체로 그려지는 괴물 Ikky의 묘사는 정말 꿈에 나오지 않을까 싶을만큼 압권입니다.
악마차
SF 버전으로 쓰여진 30년대 서부극. 서부극은 취향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관계로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마지막 문단은 많은 여운을 남깁니다.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화성인. 고전 SF의 단골손님이자 B급 SF 영화의 주된 악역인 이들을 놀랍도록 아름다운 존재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설픈 문어 외계인이 아니라, 현악기 반주에 맞춰 바람의 춤을 추며 사막 속의 도시와 종교건축물을 가진 이성적인 종족의 사라져가는 말예들입니다. 주인공 갤린저가 보여주는 독특한 면모들도 마음에 듭니다. 그 자신 천재 시인이기도 한 그는 화성을 효과적으로 묘사하는데 지구의 온갖 작가들과 문헌들을 끌어다 쓰는데, 화성이 정말로 이런 곳이라면 비교문화학자들의 천국이 되겠군요.
중간에 나오는 '화성어의 완곡어법과 빙빙 돌려 말하기는 한국어를 능가할 정도였다'라는 문장에서 약간 놀라게 됩니다. 우리말은 외계어란 말인가 -_-
괴물과 처녀
정말로 기발하고 재기넘치는 두페이지짜리 장편(掌篇). 조금만 더 길었거나 작가의 재기가 부족했더라면 시시해질 수도 있었던 꽁트였겠지만, 두려워하는 듯한, 혹은 웅성거리는 듯한 묘사와 압축적인 비약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면 무슨 말인지 전혀 못 알아들으시겠죠 -_- 직접 봐야 알 수 있는 꽁트입니다.
이 죽음의 산에서
우주에서 가장 높은 산에 도전하는 등반가의 이야기. SF에 등산이라니 약간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산은 젤라즈니가 좋아할 만한 소재입니다. 산은 인간이 무한히 고독해질 수 있는 공간이고, 동시에 위로 위로 한발짝씩 다가갈 수 있는 곳이니까요.
'위대하고 강대한 자연력에 대해서 어떤 선망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어. 이들 산은 각자 신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각자 불멸의 힘을 가지고 있는. 만약 당신이 그 사면 위에서 제물을 바친다면, 그 산은 당신에게 어떤 은총을 내려 주고, 한동안 당신은 그 힘을 나눠 가질 수 있을지도 몰라. 산이 나를 부르는 건 아마 그 때문인지도...'
젤라즈니에게 산은 그런 장소인 모양입니다.
수집열
역시 5페이지의 짧은 꽁트. 이쪽은 대화체로 이야기가 진행되어 신선한 맛이 있긴 하지만 재기발랄한 면은 '괴물과 처녀'에 비해 떨어지는군요.
완만한 대왕들
정말로 유쾌한 꽁트. 이렇게 순수하게 유쾌한 SF는 스타니스와프 렘을 연상시키는 면도 없지 않군요. 행성을 지배(?)하는 정말로 '완만한' 두 분 대왕의 수천년에 걸친 통치(혹은 무위)의 기록입니다 -_-
폭풍의 이 순간
냉동수면을 거듭하며 행성과 시간 사이를 떠돌아다니는 남자의 이야기. 처음엔 약간 저어했는데 읽으면 읽을 수록 맛이 나는 중편입니다. 시간여행자의 '역마살'을 이만큼 탁월하게 표현한 작품은 만나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단역으로 등장하는 소심하고 유치한 소시민적 캐릭터 척의 묘사도 이상하게 마음에 남습니다. 젤라즈니 작품에서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유형의 인물이라서 그럴지도 몰라요.
'이런 생각만은 자주 하곤 한다. 혹시 언제, 어딘가에 나를 위한 황금 시대가, 르네상스가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어딘가에 존재하는 나의 시대가, 단 한 장의 티켓, 단 하나의 비자, 단 한 장의 일기장 너머 어딘가에 있다고. 어디가 될지는 모른다. 누가 그런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이 문장은 볼 때마다 여행을 떠나고 싶게 만듭니다.
특별 전시품
시대로부터 버림받은 예술가, 혹은 예술가를 보는 사회적 편견에 의해 약혼자를 박탈당한 연인인 두 남녀는 미술관에서 예술작품 그 자체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SF나 환상의 요소는 없지만 시니컬하고 풍자적이며 유쾌한 단편.
성스러운 광기
드물게도 감각적이며 환상적인 단편. 시간여행의 아이디어는 이제 SF의 장르적 장치들 가운데서도 가장 진부한 장치가 되었지만, 거꾸로 돌아가는 시간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죠. 거꾸로 돌아가는 시간의 재기넘치는 묘사가 훌륭한, 신선한 느낌의 단편입니다.
사랑은 허수
앰버 연대기를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이 단편의 모양새가 익숙하실지도 모르겠어요. 앰버가 쓰여지기 수년 전부터 그의 머리속에는 앰버의 구상이 들어있었던 모양입니다. 익숙한 '헬라이드'의 묘사나 코윈의 원형으로 보이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반가운 작품입니다.
화이올리를 사랑한 남자
생명과 신성을 다루는 신화적인 느낌이 강하게 풍기는 단편. 건조한 사막 같은 계곡 안에서 죽음을 지배하고 있는 사이보그인 주인공과 사이렌의 다른 버전인 듯한 화이올리가 만드는 이야기는 정말로 그리스 비극의 한 장인 것 같은 분위기를 풍깁니다.
루시퍼
모든 불빛이 정지한 잠든 도시에 돌아온 한 남자가 단 93초동안 도시의 옛 불빛과 그 영화를 되살려놓고 쓸쓸하게 돌아갑니다. 이 SF답지 않은 단편집 중에서 가장 SF적 성격이 강한 단편. 주인공은 마지막에서 딱 한번 아무도 없는 도시를 향해 대사를 발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돌아갑니다.
프로스트와 베타
인간이 사라진 지구에 남아 지구를 관리하는 컴퓨터 프로스트는 사라진 인간들의 유물로부터 인간의 흔적을 따라가다가 스스로 인간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고전 SF의 냄새가 나면서도 어떤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이 숨어있는, 이 단편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단편입니다. 어쩌면 가장 좋아하는 SF 단편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어요. 젤라즈니도 이 작품을 가장 좋아했다는 말이 있지요. For a Breath I Tarry (숨결이 한번 스치는 동안 나는 기다린다) 라는 원제가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캐멀롯의 마지막 수호자
프로스트와 베타를 읽으며 불타오르고 나서 늘 진이 빠진 상태로 읽게 되는 단편 -_- 젤라즈니가 좋아할 만한 주제이기는 하지만, 판타지 문학에서는 이제 약간 식상해진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젤라즈니는 판타지에도 재능이 넘치는 작가지만, SF적 요소가 완전히 빠져버리면 좀 재미없어지는 것 같아요.
12월의 열쇠
고독한 인간이 어떻게 고독한 신이 되는가에 관한 이야기. 젤라즈니에게 SF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고, 그가 천착하는 주제는 언제나 생명, 신성, 시간, 신화와 같은 기술과는 거리가 먼 주제들이죠. 주인공 쟈리 다크는 거의 전형성이 느껴질만큼 젤라즈니 주인공들의 요소들을 하나하나 모아둔 인물입니다. 밀레니엄 단위의 시간을 휙휙 건너뛰는 건 SF의 기본 소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간격 사이에 행성에서 일어난 변화를 강렬한 이미지로 그려내는 재주는 역시 젤라즈니가 아니면 보기 힘든 재주입니다.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
굉장히 호의적인 평에 비하면 약간 실망스러운 단편. 그래도 하드보일드한 문체 가운데 유독 팔팔하게 살아있는 문체로 그려지는 괴물 Ikky의 묘사는 정말 꿈에 나오지 않을까 싶을만큼 압권입니다.
악마차
SF 버전으로 쓰여진 30년대 서부극. 서부극은 취향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관계로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마지막 문단은 많은 여운을 남깁니다.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화성인. 고전 SF의 단골손님이자 B급 SF 영화의 주된 악역인 이들을 놀랍도록 아름다운 존재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설픈 문어 외계인이 아니라, 현악기 반주에 맞춰 바람의 춤을 추며 사막 속의 도시와 종교건축물을 가진 이성적인 종족의 사라져가는 말예들입니다. 주인공 갤린저가 보여주는 독특한 면모들도 마음에 듭니다. 그 자신 천재 시인이기도 한 그는 화성을 효과적으로 묘사하는데 지구의 온갖 작가들과 문헌들을 끌어다 쓰는데, 화성이 정말로 이런 곳이라면 비교문화학자들의 천국이 되겠군요.
중간에 나오는 '화성어의 완곡어법과 빙빙 돌려 말하기는 한국어를 능가할 정도였다'라는 문장에서 약간 놀라게 됩니다. 우리말은 외계어란 말인가 -_-
괴물과 처녀
정말로 기발하고 재기넘치는 두페이지짜리 장편(掌篇). 조금만 더 길었거나 작가의 재기가 부족했더라면 시시해질 수도 있었던 꽁트였겠지만, 두려워하는 듯한, 혹은 웅성거리는 듯한 묘사와 압축적인 비약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면 무슨 말인지 전혀 못 알아들으시겠죠 -_- 직접 봐야 알 수 있는 꽁트입니다.
이 죽음의 산에서
우주에서 가장 높은 산에 도전하는 등반가의 이야기. SF에 등산이라니 약간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산은 젤라즈니가 좋아할 만한 소재입니다. 산은 인간이 무한히 고독해질 수 있는 공간이고, 동시에 위로 위로 한발짝씩 다가갈 수 있는 곳이니까요.
'위대하고 강대한 자연력에 대해서 어떤 선망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어. 이들 산은 각자 신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각자 불멸의 힘을 가지고 있는. 만약 당신이 그 사면 위에서 제물을 바친다면, 그 산은 당신에게 어떤 은총을 내려 주고, 한동안 당신은 그 힘을 나눠 가질 수 있을지도 몰라. 산이 나를 부르는 건 아마 그 때문인지도...'
젤라즈니에게 산은 그런 장소인 모양입니다.
수집열
역시 5페이지의 짧은 꽁트. 이쪽은 대화체로 이야기가 진행되어 신선한 맛이 있긴 하지만 재기발랄한 면은 '괴물과 처녀'에 비해 떨어지는군요.
완만한 대왕들
정말로 유쾌한 꽁트. 이렇게 순수하게 유쾌한 SF는 스타니스와프 렘을 연상시키는 면도 없지 않군요. 행성을 지배(?)하는 정말로 '완만한' 두 분 대왕의 수천년에 걸친 통치(혹은 무위)의 기록입니다 -_-
폭풍의 이 순간
냉동수면을 거듭하며 행성과 시간 사이를 떠돌아다니는 남자의 이야기. 처음엔 약간 저어했는데 읽으면 읽을 수록 맛이 나는 중편입니다. 시간여행자의 '역마살'을 이만큼 탁월하게 표현한 작품은 만나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단역으로 등장하는 소심하고 유치한 소시민적 캐릭터 척의 묘사도 이상하게 마음에 남습니다. 젤라즈니 작품에서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유형의 인물이라서 그럴지도 몰라요.
'이런 생각만은 자주 하곤 한다. 혹시 언제, 어딘가에 나를 위한 황금 시대가, 르네상스가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어딘가에 존재하는 나의 시대가, 단 한 장의 티켓, 단 하나의 비자, 단 한 장의 일기장 너머 어딘가에 있다고. 어디가 될지는 모른다. 누가 그런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이 문장은 볼 때마다 여행을 떠나고 싶게 만듭니다.
특별 전시품
시대로부터 버림받은 예술가, 혹은 예술가를 보는 사회적 편견에 의해 약혼자를 박탈당한 연인인 두 남녀는 미술관에서 예술작품 그 자체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SF나 환상의 요소는 없지만 시니컬하고 풍자적이며 유쾌한 단편.
성스러운 광기
드물게도 감각적이며 환상적인 단편. 시간여행의 아이디어는 이제 SF의 장르적 장치들 가운데서도 가장 진부한 장치가 되었지만, 거꾸로 돌아가는 시간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죠. 거꾸로 돌아가는 시간의 재기넘치는 묘사가 훌륭한, 신선한 느낌의 단편입니다.
사랑은 허수
앰버 연대기를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이 단편의 모양새가 익숙하실지도 모르겠어요. 앰버가 쓰여지기 수년 전부터 그의 머리속에는 앰버의 구상이 들어있었던 모양입니다. 익숙한 '헬라이드'의 묘사나 코윈의 원형으로 보이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반가운 작품입니다.
화이올리를 사랑한 남자
생명과 신성을 다루는 신화적인 느낌이 강하게 풍기는 단편. 건조한 사막 같은 계곡 안에서 죽음을 지배하고 있는 사이보그인 주인공과 사이렌의 다른 버전인 듯한 화이올리가 만드는 이야기는 정말로 그리스 비극의 한 장인 것 같은 분위기를 풍깁니다.
루시퍼
모든 불빛이 정지한 잠든 도시에 돌아온 한 남자가 단 93초동안 도시의 옛 불빛과 그 영화를 되살려놓고 쓸쓸하게 돌아갑니다. 이 SF답지 않은 단편집 중에서 가장 SF적 성격이 강한 단편. 주인공은 마지막에서 딱 한번 아무도 없는 도시를 향해 대사를 발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돌아갑니다.
프로스트와 베타
인간이 사라진 지구에 남아 지구를 관리하는 컴퓨터 프로스트는 사라진 인간들의 유물로부터 인간의 흔적을 따라가다가 스스로 인간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고전 SF의 냄새가 나면서도 어떤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이 숨어있는, 이 단편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단편입니다. 어쩌면 가장 좋아하는 SF 단편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어요. 젤라즈니도 이 작품을 가장 좋아했다는 말이 있지요. For a Breath I Tarry (숨결이 한번 스치는 동안 나는 기다린다) 라는 원제가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캐멀롯의 마지막 수호자
프로스트와 베타를 읽으며 불타오르고 나서 늘 진이 빠진 상태로 읽게 되는 단편 -_- 젤라즈니가 좋아할 만한 주제이기는 하지만, 판타지 문학에서는 이제 약간 식상해진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젤라즈니는 판타지에도 재능이 넘치는 작가지만, SF적 요소가 완전히 빠져버리면 좀 재미없어지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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